영화 더 메뉴 계급 풍자 소비 정체성 파괴는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소비 계층의 허위성과 인간 정체성의 위선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스릴러입니다. 라프 파인즈의 섬뜩한 연기와 아냐 테일러 조이의 주체적 시선이 날카롭게 맞물리며, 소비와 권력, 자아의 해체를 긴장감 있게 풀어냅니다.
고급 요리 한 접시 속 권력의 단면
〈더 메뉴〉는 단순한 미식 영화가 아닙니다. 이 영화는 고급 요리를 제공하는 외딴섬의 레스토랑이라는 설정을 통해 현대 소비사회와 계급 구조의 민낯을 날카롭게 드러냅니다. 손님들은 각각 명성을 얻은 음식 평론가, 억만장자 부부, 연예계 스타, 젊은 셰프 지망생, 그리고 아냐 테일러 조이가 연기하는 뜻밖의 인물 마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거대한 권위와 브랜드가 보장한 ‘경험’을 소비하러 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셰프 슬로윅은 단지 요리를 대접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를 통제하고 극단적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연출자에 가깝습니다. 영화는 이들의 대화를 통해 각 인물의 계층적 위치를 드러내고, 슬로윅 셰프는 이 권위의 피라미드 위에 존재하는 냉소적인 창조자 역할을 맡습니다. 마치 한 끼 식사가 계급의 상징이 된 듯한 이 설정 속에서, 요리는 더 이상 음식이 아니라 통제와 처벌, 계몽의 수단으로 변모합니다. 영화의 전개는 식사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불편하고 파괴적인 국면으로 향하며, 관객 역시 ‘경험’이라는 명목 아래 무기력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손님들의 모습에 불쾌함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영화는 ‘무엇을 먹는가’보다 ‘누가 먹는가’가 중요한 세상을 고발하며, 이 허위성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조성합니다.
소비주의와 계급, 허울뿐인 욕망의 해부
〈더 메뉴〉는 소비를 둘러싼 집착과 허위의식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손님들은 고가의 식사를 통해 자신의 지위를 증명하려 하며, 셰프 슬로윅은 그런 그들의 욕망을 정확히 읽고 조롱합니다. 영화는 ‘셰프가 요리를 멈추면 예술은 사라진다’는 식의 대사로,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관계를 전복시킵니다. 셰프는 더 이상 손님을 만족시키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손님의 허위적 존재를 깨뜨리기 위해 창조를 멈추지 않는 파괴자이자 연출자입니다. 등장인물 각각은 현대 소비 사회에서 실제로 존재할 법한 인물들입니다. 맛을 논하지만 음식 자체엔 관심 없는 평론가, 유명세를 소비하려는 스타, 아무것도 모르면서 ‘미식’을 즐긴다고 착각하는 SNS세대, 그리고 무언가를 꾸준히 쌓아왔지만 결국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슬로윅 셰프 자신까지. 이들은 모두 정체성보다 허상에 가까운 껍데기 속에서 살아갑니다. 셰프는 이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점차 그들의 가면을 벗겨나갑니다. 슬로윅이 연출하는 식사는 요리의 영역을 넘어, 일종의 통제된 의식(ritual)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마치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유일한 신성함처럼 소비자에게 받아들여지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소비자가 더 이상 주체가 아니고, 창조자마저 그 권위에 갇혀버리는 이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진실된 감정과 의문을 제기하는 인물이 마고입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이며, 소비자라는 역할에 강하게 저항합니다. 영화는 마고라는 인물을 통해 정체성 회복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관객에게도 지금 우리가 ‘경험’이라고 부르는 모든 소비가 과연 나의 것인지 묻게 만듭니다.
정체성의 해체와 존재를 선택하는 주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관객에게 가장 통쾌하면서도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마고는 슬로윅에게 ‘햄버거’를 요청함으로써, 모든 미식적 허세를 해체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반전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허상 속에서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셰프 슬로윅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음식 자체의 기쁨을 기억하고, 마고에게 식사를 허락함으로써 그녀의 ‘주체성’을 인정합니다. 이는 마고가 유일하게 이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그녀는 셰프가 만든 서사 속 등장인물이기를 거부하고, 다시 삶의 현실로 돌아가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 장면은 마고의 생존 자체가 단순한 탈출이 아니라,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상징적 행위라는 점에서 강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우리가 소비하는 것들이 과연 우리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깁니다. 고급 요리 한 접시가 인간을 어떻게 분류하고, 계급화하고, 정체성마저 지워버릴 수 있는지를 섬뜩하게 드러낸 〈더 메뉴〉는 음식이 아닌 사람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강한 긴장과 아이러니, 통렬한 유머를 유지한 채, 이 영화는 단지 스릴러가 아니라 현대 사회를 향한 정교한 비판서로 완성됩니다.
글을 마치며: 먹는 자와 만드는 자의 경계에서
〈더 메뉴〉는 단순한 음식 영화나 셰프의 이야기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현대 소비사회가 만들어낸 계급적 위선과 정체성의 허구를 미식이라는 포장을 통해 고발합니다. 셰프라는 창조자조차도 자기 세계에 갇혀 있었고, 손님들은 자기가 소비하는 것조차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경험에 종속되어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마고만이 선택의 주체로 남았고, 그 선택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지금 우리가 즐기는 경험, 우리가 말하는 ‘취향’이라는 것들이 정말 우리 자신의 것인지 되묻게 만드는 작품. 〈더 메뉴〉는 그렇게 끝까지 관객의 자아에 질문을 던집니다.